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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무형문화재

우리 옛것을 보고, 배우고, 즐기는 전통문화관입니다.

공대일

공 대 일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 지정종목남도판소리 <흥보가>
  • 생      몰1911. 1. 17. ~ 1990. 2. 4.
  • 인정일1974. 5. 28.
  • 전승계보박유전 - 이날치 - 김채만 - 공창식·박동실·성원목·임방울·장판개·박기채 - 공대일 - 김향순·성창순·박초선·송순섭·김성권·방성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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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대일(孔大一) 선생은 1911년 전남 승주군 송광면 월산리 추동마을의 세습예인 집안출신으로 공성도(孔聖道)와 하복심(河福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 선순이(宣順伊)와의 사이에 4남매를 두었으며, 일인창극으로 명성이 높은 공옥진의 부친이기도 하다.
 15세 무렵 판소리에 입문하였다. 8촌형인 화순 공창식에게 <흥보가>와 <춘향가>를 배웠으며, 담양의 박동실에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소리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장판개, 박기채, 송원목, 임방울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과 교유하면서 소리를 익혀 마침내 판소리 5마당을 완창할 수 있었다. 몹시 가난했던 까닭에 독선생을 모실 수 없어 틈틈이 여러 선생에게 소리를 배워 성음에 이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공대일 명창은 공연활동보다는 교육을 중시하며 평생을 바쳤다. 광복 전후로 동일창극단과 광주성악연구회에서 소리도 했지만, 1945년 광주권번, 1949년 전주권번, 1952년 정읍권번에 출강하였고, 광주의 호남국악원(1955), 전남민속예술학원(1960), 남도국악학원(1976)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세습예인 출신답게 고사소리에도 능했으며, 남도지역의 판소리 전승에 기여한 공적이 높을 뿐만 아니라, 특히 서편제의 명맥을 이어 <흥보가>의 전형을 전승하는 보유자로 평가받았다.
이연채

이 연 채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7호

  • 지정종목남도의례음식장
  • 생      몰1916. 12. 6. ~ 1994. 3. 25.
  • 인 정 일1989. 3. 20.
  • 전승계보보성임씨할머니 - 최교영·이장전-최계원·윤석심 – 이광숙·최부진(어머니) - 이연채 - 최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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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연채(李蓮采) 선생은 광주시 태생으로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뒤, 줄곧 우리 음식 만들기에 70여년을 전념했다. 어려서부터 눈썰미가 있고 솜씨가 뛰어났으며, 음식은 탐진 최씨인 어머니로부터 직접 배웠다. 외가는 광주 토호로 한말 지방관아의 요리를 했고, 외할머니는 궁중요리를 배웠다고 한다.
 의례에는 반드시 음식이 따른다. 관혼상제뿐만 아니라 각종 잔치며, 세시의례에도 음식은 필수다. 또한 음식은 지역별로 고유성과 향토색 짙은 특징을 가지며, 계층별로도 여러 가지 다른 풍미를 보인다. 이연채 명인의 의례음식은 그런 점에서 광주의 지역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꼽혔다. 대표적인 의례음식인 폐백상, 큰상, 제사상에 오르는 음식 수백 종을 만들었고, 특히 신선로 음식을 조리하고, 또 다식과 문어오림에도 다른 사람들이 흉내 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특기를 보였다.
 이연채 명인은 의례음식뿐만 아니라 술도 잘 빚었으며, 직접 떡살과 다식판을 만드는 재주도 가졌었다. 음력 정월 상해일(上亥日)에 만든다 하여 이름이 붙은 상해주를 빚는데 탁월한 솜씨를 가졌다. 명맥이 끊겨가던 다식판과 떡살 제작에도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보였다.
 사후에 이연채 명인의 관련, <이연채 명인의 남도전통음식>(황기록, 다지리, 2000)과 <전통음식·떡살: 남도의례음식기능보유자 이연채>(김규식 편, 오성출판사, 2002) 두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조카인 현 기능보유자 최영자가 가계전승과 함께 고모인 이연채 명인에게서 의례음식 기능을 전수받았고, 떡살은 목조각장 김규석이 계승하고 있다.
박옥심

박 옥 심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2호

  • 지정종목판소리 강산제 <심청가>
  • 생      몰1921. 4. 12. ~ 1995. 9. 21.
  • 인 정 일1976. 9. 3.
  • 전승계보<심청가> 박유전 -정재근 -정응민 - 박옥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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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옥심(朴玉心) 선생의 예명은 박춘성(朴春城)으로 전남 보성군 득량면 박실에서 태어났으며, 회천면으로 출가하였다.
 12살 때 처음 이진영에게 단가를 배우기 시작해서 13세부터 33세까지 20여년간 보성 정응민 문하에서 다른 여러 국악 지망생들과 함께 판소리를 배웠다. 21살 때는 조선성악연구회에 입회하여 지방순회공연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2년 뒤 결혼 후에 잠시 소리를 접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광주에 이주하여 다시 소리를 시작하였으며, 1971년부터 광주국악원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활발히 전수교육에 매진하였고, 1980년대에는 광주 소재 여러 대학에 출강하면서 후진 양성에 기여한 바 컸다. 박옥심 명창이 전주대사습에 나가 장원을 차지하자 보성소리에 대한 국악계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정응민은 시골에 머물면서 활동했기 때문에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지만, 그에게 보성제 소리를 배운 성창순, 성우향, 조상현 등이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고, 또 박옥심 명창이 광주시 무형문화재로 인정되면서 보성 정응민의 소리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판소리 강산제(심청가)는 1995년 박옥심 명창의 타계와 더불어 지정해제되었다.
송복동

송 복 동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3호

  • 지정종목탱화장
  • 생      몰1911. 12. 3. ~ 1998. 3. 26.
  • 인 정 일1985. 2. 25.
  • 전승계보김보응 - 문고산 - 이만종 - 박석초 - 송복동 - 송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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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복동(宋福東) 선생의 호는 구봉(龜峯)이며,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침을 잘못 맞은 것이 화근이 되어 다섯 살 때 청각 장애를 일으켜 귀가 멀어 말까지 못하게 되었다. 아홉 살에 부모님마저 여읜 소년은 외할머니 손에 끌려 순창 구암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만난 박석초 스님은 김보응, 문고산, 이만종으로 이어지는 당대 최고의 탱화장이었다. 탱화는 종이, 비단, 베 등에 청, 적, 황, 백, 흑의 오방색을 자연스럽게 조화하여 불교신앙의 대상인 여러 가지 상(像)을 그리는 것이다.
 구암사에 머물면서 천자문, 반야심경, 금강경을 익혔고, 박석초 스님에게 탱화(幁畵)뿐만 아니라 조상(造像), 개금(改金), 개채(改彩), 개조(改彫) 등도 배우면서 35세까지 스승 밑에서 일했다. 순천 송광사에서 만나 함께 일한 김일섭 스님(국가무형문화재 제48호)도 “그림 그리는 기술과 세필은 구봉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할 정도였다. 백양사에서 살다가 마흔이 넘어 결혼한 후 광산구 송정읍 운수리에 정착했지만, 언제나 새벽 3시면 부처님께 예불을 올리고 참선을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월정사와 고창 선운사 사천왕상, 해남 대흥사와 경북 묘관음사 목불을 조각했으며, 해인사 길상암 독성산신 탱화와 광주 관음사 후불탱화, 부안 내소사 후불탱화 등이 대표작으로 전한다. 지금까지 그가 남긴 작품은 불상 400여위, 불화 400여위, 단청 90여 사찰에 이른다. 1998년 그의 사후에 지정해제되었다가 2012년 그의 아들인 송광무가 시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어 화맥을 전승하고 있다.
안채봉

안 채 봉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6호

  • 지정종목판소리 서편제
  • 생      몰1924. 10. 8. ~ 1999. 11. 13.
  • 인 정 일1989. 3. 20.
  • 전승계보김세종 - 김찬업 - 정응민 - 안채봉 - 정영자·김설행·김영숙·김지숙·김현미·성훈·성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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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봉(安彩鳳) 선생은 전남 나주군 남평면 상곡리 아래울마을의 세습예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물론 아버지 안영권도 나주에서 민속악을 잘 했던 명인으로 알려져 있다. 13세에 큰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양녀로 입양되면서 광주권번으로 보내져 기생수업을 시작했다.
 광주권번에서 3년간 박동실에게 단가와 심청가를 배우고, 박영구에게서 그녀를 보다 유명하게 만든 소고춤을 비롯해서 살풀이춤, 검무, 승무 등을 배웠다. 이때 조몽실, 임방울 등에게도 판소리를 배울 기회를 얻었다. 권번 수업을 끝내고 화순에서 안기선에게 <춘향가>를 익힌 후 16세에 함경도 청진권번으로 옮겼으며, 오태석, 박동실, 임억돌, 조몽실, 조상선, 방태진 등이 만들어 활동한 창극단에 들어가 만주지방 순회공연도 했다. 고생 끝에 광주로 왔지만, 다시 큰아버지는 안채봉 명창을 일본 동경으로 보내 히데코라는 이름으로 춘향각이라는 조선인 요리집에서 예기로 일하게 했다.
 해방 후 잠시 국극단 활동을 하다가 보성 정응민을 독선생으로 모시며 판소리를 배우고, 한진옥에게 살풀이춤, 김종기에게 가야금을 전수받는다. 명창으로도 알려져 있지만, 역시 명무로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 판소리와 가야금병창 외에 살풀이, 소고춤으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풍부한 성음으로 특이한 창조를 구사했으며, 재담에도 능했다. 서편제 창자이면서도 동편제의 기법을 표현할 수 있는 창자로 평가받았다.
 귀국 후 목포국악원과 1980년부터는 광주시립국악원에서 판소리를 가르쳤고, 광주예고에서도 가르치는 등 활발한 전수교육을 통해서 많은 후진 국악인을 길러냈다.
송복동

서 창 순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 지정종목광산농악 설북
  • 생      몰1916. 7. 10. ~ 1999. 12. 29.
  • 인 정 일1992. 3. 16.
  • 전승계보김복만·김홍식·김성락·유흠선 - 서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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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창순(徐昌淳) 선생은 전남 무안군 일로읍 출생으로 10세부터 걸립패의 소동으로 활동하면서 진안의 김복만, 고창의 김홍식, 영광의 김성락, 장성의 유흠선 명인들에게 통북 및 들놀음 기능을 전수받았다. 서창순 명인도 영광의 전경환과 같이 영무장농악 활동을 하였다.
 1992년 지정 당시 상쇠 정득채, 설장고 김종회, 설북 서창순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광산농악은 현재 광산구 지역에서 넓게 전승되어 왔으며, 영산강 상류의 평야지대인 마륵동의 판굿을 기초 가락으로 하면서 칠석동의 고싸움농악, 소촌동의 당산농악, 산월동의 풍장농악, 평동과 동곡의 걸립농악 등 광산구의 다양한 농악이 집대성된 것으로 호남우도농악에 속한다.
 광산농악대는 적게는 20∼30명, 많게는 50∼70명으로 구성된다. 광산농악은 내드름-본가락-맺음가락으로 연주되는 쇠가락을 따르며, 가락마다 시작과 끝을 분명히 하는 점, 다른 가락으로 들어갈 때는 상쇠가 새 가락의 대표 가락을 몇 번 반복 연주해 줌으로써 새 가락으로 전환할 뜻을 명확히 전달, 전환이 보다 자연스럽고 깨끗하게 이루어지는 점 등이 특징으로 꼽힌다.
 1988년 제2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광산소촌농악’으로, 1989년도엔 ‘광산마륵농악’으로 참가하여 입상하였고, 1990년 제31회에선 전경환의 동생인 전경석이 상쇠로 출연하여 문화부장관상을 받았다.
김종회

김 종 회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

  • 지정종목광산농악 설장고
  • 생      몰1918. 9. 29. ~ 2000. 3. 14.
  • 인 정 일1992. 3. 16.
  • 전승계보김만석·강성수·최막동 - 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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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회(金宗會) 선생은 전남 담양군 무정면 출신으로, 20세부터 영광의 김만석, 나주 영산포의 강성수, 광주의 최막동 등 설장고 명인들에게 장고를 배웠고, 35세부터 임방울극단, 여성국극단 등에서 활동하면서 전경환, 김오채 등 호남우도농악 명인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한때 임실필봉농악대에도 참여한 바 있다.
 1992년 지정 당시 상쇠 정득채, 설장고 김종회, 설북 서창순이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광산농악은 현재 광산구 지역에서 넓게 전승되어 왔으며, 영산강 상류의 평야지대인 마륵동의 판굿을 기초 가락으로 하면서 칠석동의 고싸움농악, 소촌동의 당산농악, 산월동의 풍장농악, 평동과 동곡의 걸립농악 등 광산구의 다양한 농악이 집대성된 것으로 호남우도농악에 속한다.
 광산농악대는 적게는 20∼30명, 많게는 50∼70명으로 구성된다. 앞치배는 쇠 4∼6명, 장고 6∼8명, 북 8∼10명, 징 3∼4명, 소고 20∼25명, 긴 쇠나발 1명, 쇄납 1명, 기수 3∼5명(영기 2명, 농기 1∼3명)으로 편성되고, 뒷치배인 잡색은 8인(대포수, 양반, 할미, 각시, 조리중, 참봉, 남 무동, 여 무동)이지만, 비리쇠와 홍작삼이 추가되기도 한다.
 1988년 제2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광산소촌농악’으로, 1989년도엔 ‘광산마륵농악’으로 참가하여 입상하였고, 1990년 제31회에선 전경환의 동생인 전경석이 상쇠로 출연하여 문화부장관상을 받았다.
천대용

천 대 용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1호

  • 지정종목판소리 고법
  • 생      몰1930. 9. 3. ~ 2001. 4. 29.
  • 인 정 일1997. 7. 3.
  • 전승계보김명환·김성권 - 천대용 - 나연주·배영배·권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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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대용(千大龍) 선생은 전남 해남군 송지면 군곡리에서 부친 천두성과 모친 경주 최씨 사이에서 1남 5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고 싶던 그는 17세가 되던 1946년 보성의 정응민 문하에 들어가 3년간 판소리 〈심청가〉를 배웠다. 이후 박봉술에게 〈적벽가〉와 〈수궁가〉를 배웠으며, 국가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고법 최초 예능보유자였던 김명환에게 북을 배우면서 명창보다는 고수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1965년 거처를 서울로 옮기면서 생활고 해결을 위해 잠시 생선장사도 한 바 있는데, 그때 안산의 이정업을 만나 판소리 고법을 익히고, 1970년경 김성권 명고에게 북의 변이 가락을 익히면서 본인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해갔다. 장월중선에게는 아쟁과 칠현금을 배워 이 역시 명인다운 면모를 자랑했다.
 한때 여성국극단 햇님달님의 전속고수로 순회공연을 다닌 바도 있다. 서울 국립창극단의 상임고수로 재직하였고, 한승호, 박동진, 안채봉, 오정숙, 조상현 등 명창들의 요청으로 완창발표회에서 지정고수로 활동하면서 명성을 높이 쌓았다. 1993년 제13회 전국고수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서울생활을 접고 광주에 정착하면서 광주시립국극단 상임 수석지정고수로 활동하는 한편 북구 운암동에 판소리고법연구원을 열어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선생의 고법은 속이 후련하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김명환의 끊어치는 대마디 대장단, 이정업의 화려한 북가락, 그리고 김성권의 엇장단을 두루 섭렵하여 본인의 독특한 고법을 이룩했기 때문에 가능한 평가이다.
안종선

안 종 선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

  • 지정종목필장
  • 생      몰1911. 11. 4. ~ 2002. 1. 16.
  • 인 정 일1985. 2. 25.
  • 전승계보안재환 - 안규상 - 안종선 - 안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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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종선(安種善) 선생은 광주시 백운동에서 붓을 만들어 왔다. 붓 만드는 일은 그의 할아버지 대부터 시작했다. 전남 보성군 문덕면 출신인 그의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붓을 만드는 재주가 남달랐다. 그러나 집안에서 당시 천대받던 장인이 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자 만주로 일터를 옮겨 붓 제작으로 생계를 삼았다. 연유는 알 수 없지만, 1930년대에 광주로 옮겨와 백운동에 터를 잡았고, 그 아들인 안규상을 거쳐 안종선에까지 붓 제작은 가업으로 전해져 왔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백운동 일대에는 20여호에 이르는 붓 만드는 집이 있었다. 백운동의 옛 지명인 진다리라는 이름을 딴 진다리붓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붓공예를 하는 집이 늘어났지만, 아무도 안종선 명장의 붓을 따를 수는 없었다고 한다.
 좋은 붓은 끝이 뾰족한 첨(尖), 가지런한 제(濟), 털 모듬이 둥근 원(圓), 힘이 있는 건(健)의 요소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러한 요소를 모두 갖춘 진다리붓은 모가 가늘면서 노란 윤기가 나고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끝이 갈라지지 않아서 전국적으로 많은 유명 작가들에 의해서 애용되었다. 안종선 명장은 전국관광민예품전에 출품하여 10여 차례 이상 수상하기도 했다.
 1985년 2월 25일 지정되었다가 1987년 12월 31일 해제되었지만, 그 후 2005년에 안종선 명장의 아들 안명환이 대를 이어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아 4대째 가업을 전승하고 있다.
김 복 동

김 복 동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

  • 지정종목필장
  • 생      몰1931. ~ 2007. 3. 26.
  • 인 정 일2005. 3. 3.
  • 전승계보김순주 - 김선일 - 김복동 - 김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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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복동 선생은 전남 진도 출신으로서 집안이 일제강점기 때 이사해와 이후 광주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 김순주, 아버지 김선일에 이어 3대째 붓을 만들어왔으며, 그의 아들 김병섭이 대를 이어 4대째 붓을 만들고 있다. 본래 붓 만드는 것을 평생의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7남매 중 장형인 김경환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았으나 일찍 작고한 터였고, 김복동 역시 군대를 다녀와서 26세가 되었지만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어려서부터 눈으로 배워왔던 붓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붓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던 광주 백운동에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필장으로의 길에 나서게 되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붓을 찾는 사람이 많아 부인과 장녀도 함께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본래 붓은 경남의 밀양과 전남의 광주가 유명했으며, 광주에서 만든 붓은 진다리붓으로 통칭했다. 그러나 안종선 일가에서 상표등록을 한 후, 진다리붓이라는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게 되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김복동은 한글을 쓰는 한글붓, 사군자를 그리는 사군자붓, 서예용과 작품용붓으로 사용되는 황세붓, 일반적 서예용으로 쓰는 장봉붓, 대·중·소 액자붓 등을 만들었으며, 대개 이들은 흰 염소털을 사용하여 만들지만, 갈필(葛筆), 죽필(竹筆), 공작붓, 말꼬리붓도 만들었다. 붓의 겉털과 속털을 가려 감싸는 비법이 남달랐으며, 또한 털을 만져보면 어떤 동물의 암컷·수컷 털인지도 쉽게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련했다. 명품으로 소문이 나서 의재 허백련 선생을 비롯해서 전국적으로 많은 서화가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조 기 정

조 기 정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

  • 지정종목청자 도공
  • 생      몰1939. 6. 22. ~ 2007. 12. 27.
  • 인 정 일1986. 9. 29.
  • 전승계보조창엽 - 조기정 - 이용희·김손기·김경진·권운주·강성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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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기정(曺基正) 선생의 호는 고현(古現)이며, 광주시 양동에서 출생하였다. 전남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남다른 예술적 감수성과 사명감을 가진 그는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고려청자의 비색(翡色)에 끌려 평생을 고려청자의 비취색 복원을 꿈꾸는 도예가로서 외길을 걸었다.
 그는 고려청자의 형태미보다는 은은한 비색을 발산해내는 색조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 원료에 관심을 더 쏟으면서 오랜 세월 단절된 기술을 되살리려 매달렸다. 고려청자 본래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평생 자신을 담금질하였던 것이다. 고려청자의 매혹적인 비색의 비결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조개껍질 또는 석회석과 미량의 철분이 함유된 원료를 혼합하여 만든 유약이 열쇠라는 이론을 처음 제기하였다. 거듭되는 시행착오를 딛고 새로운 연구 성과를 얻기 위하여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1000여 개가 넘는 도요지를 발굴 및 답사하였고, 이때의 경험을 정리하여 <고도자소고(古陶磁小考)>, <녹청자소고(綠靑磁小考)> 등 저서를 펴내기도 하였다. 그가 재현한 고려청자는 90% 이상 고려청자 본래의 비색에 접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6년 광주YMCA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67년 무등도요를 설립하여 작품활동에 더욱 열정을 쏟아내면서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활동을 하였다. 1978년 성옥문화재단과 1988년 금호문화재단으로부터 예술문화상을 받았다.
이 상 술

이 상 술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4호

  • 지정종목필장
  • 생      몰1931. ~ 2007. 3. 26.
  • 인 정 일2005. 3. 3.
  • 전승계보박희선·박남규·안치선·유종구·정경태 – 이상술 – 김순경·이미화(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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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술(李相珬) 선생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 반남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친 이호곤과 모친 전양순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는 가곡, 가사와 더불어 정악으로 불리는데, 민중들 사이에서보다는 상류층들이 즐기면서 조선조 후기에 화려하게 꽃피었던 가창문화였다. 시조창은 지역마다 특징이 있어 서울 경기도 경제, 충청도 내포제, 경상도 영제, 그리고 전라도 완제가 전승되고 있다. 완제시조는 연결성이 발달하여 소리가 윤택한 것이 특징이다. 일제강점기 때도 광주와 나주에는 완제시조창이 활발했다. 광주의 박남규, 나주의 박희성이 유명했으며, 이들 소리를 광나제라고 따로 부를 정도였다.
 부친의 친구이기도 한 나주의 박희성은 이상술 명인이 19세 되던 해에 해방도 되고 했으니 우리 것을 찾고 지키자는 뜻으로 시조를 배울 것을 권유했다. 21세부터는 광주의 박남규에게도 배웠으며, 28세 때에 광주국악원의 안치선에게 찾아가 시조창과 단소를 사사, 34세엔 유종구에게 시조를 다듬었으며, 37세엔 정경태에게 재학습 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 예능보유자였던 정경태는 이상술의 시조창을 듣고 정통 완제라 하며 채보를 하여 전국에 알렸으며, 현재까지 완제의 전형으로 통하고 있다.
 이상술 명인은 시조 외에도 단소, 소리북 등에 능하며 풍부한 성량을 지니고 있어 변화무쌍한 장단을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정경태와 함께 대한시우회를 발족, 시조창 보급과 지도에 힘쓰면서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는데 기여한 바 있다.
한 해 자

한 해 자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

  • 지정종목판소리 강산제
  • 생      몰1942. 8. 2. ~ 2012. 3. 12.
  • 인 정 일2002. 12. 27.
  • 전승계보〈심청가〉 박유전 - 정재근 - 정응민 - 성창순 - 한해자 - 한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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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해자(韓海子) 선생은 전남 나주시 세지면 출신으로 예명은 한송희이다. 광주여고 2학년에 재학하던 중 국극단에 매료되어 당시 광주국악원 강사로 있던 정광수를 찾아가 <수궁가>, <적벽가>, <흥보가>, <춘향가>를 8년 동안 배웠고, 22세부터 3년간은 김소희로부터 <춘향가>를 익혔다. 29세부터 광주시립국악원에서 박춘성, 공대일에게 <수궁가>, <적벽가>를, 한애순에게 <흥보가>를 다시 배웠다. 45세부터 5년 동안은 성창순으로부터 <심청가> 한바탕을 전수받는 등 끊임없이 판소리를 익히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49세에는 드디어 <심청가>와 <흥보가> 완창 발표를 했고, 53세에 남원 전국판소리명창대회에서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3년간 전남도립국악단에서 재직했으며, 이후 공연 활동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면서 국내는 물론 독일 함부르크 등 외국 초청공연도 많았다.
 심청가 완창 무대에서 고수를 맡았던 김성권은 한해자의 소리에 대해 “소리에는 칠성, 수리성, 아구성이 있는데, 한해자는 천부적으로 수리성을 타고나 창이 구성지고 조화를 이룬다”고 평가했다. 수리성은 약간 쉰 목소리 같으면서도 매우 맑고 청아한 소리를 가리키는 말로, 목청이 곰삭아서 조금 쉰듯하면서도 청아하여 이러한 수리성을 제일로 친다.
한 애 순

한 애 순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 지정종목남도판소리 <흥보가>, <심청가>
  • 생      몰1924. 12. 26. ~ 2014. 6. 2.
  • 인 정 일1974. 5. 28.
  • 전승계보〈흥보가〉 송흥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김정문-박록주-한애순-성우향·오정숙·임향임·임허닌·이은하 〈심청가〉 박유전-이날치-김채만-박동실-한애순-성우향·오정숙·임향임·임허닌·이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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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애순(韓愛順) 선생은 전남 곡성군 옥과면의 세습예인 집안에서 한상학과 최처녀 사이에서 태어난 여류 명창으로서, 10세에 친오빠인 명무(名舞) 한진옥에게 처음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12세부터 판소리 후원자인 박석기의 주선으로 담양의 박동실 문하에 들어가 4년간 〈심청가〉와 〈수궁가〉 두 바탕, 〈춘향가〉와 〈적벽가〉 일부를 배웠다. 이미 13세에 소리 영재로 소문이 자자하여 콜럼비아음반에 취입하기도 했다.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배웠고, 24세에는 임방울에게 〈수궁가〉를, 38세에는 박녹주에게 〈흥보가〉를 익혔다.
 17세 때부터 창극단 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일창극단, 화랑창극단, 임방울창극단, 여성국극동지회 등에서 전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했다. 광복 직후 광주성악연구회 회원, 1948년에 창단된 조선창극단 단원, 1952년 광주에서 만들어진 여성국악동지사 대표로 활동했다. 또 29세부터 7년간 광주국악원, 35세부터는 개인교습, 50세부터 광주시립국악원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한애순 명창은 발성이 가볍고, 소리의 꼬리를 길게 늘이며, 정교하게 짜여있는 서편제의 정통적인 특징을 잘 구사한다는 평을 받았다. 애원성이 깃든 음조는 조용하면서도 호소력이 넘친다. 특히 붙임새와 시김새가 정교한 박동실의 소리를 가장 완벽하게 전승한 명창으로 알려져 있다.
한 해 자

박 정 자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호

  • 지정종목남도판소리
  • 생      몰1940. 10. 5. ~ 2014. 8. 8.
  • 인 정 일2005. 3. 3.
  • 전승계보〈수궁가〉 송흥록 - 송광록 - 송우룡 - 유성준 - 정광수 - 박초월 - 조통달 - 박정자 - 박하연·이은영·김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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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자(朴貞子) 선생은 광주광역시 북구 북동에서 박흥준과 김담례 사이에서 태어났다. 14세인 1953년부터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공대일에게 <심청가>, 정광수에게 <춘향가>, 정응민에게 <심청가>, 박동준에게 <춘향가> 등을 배웠고, 19세부터 2년간 여수에 머물면서 박봉술에게 <적벽가>를 배웠다.
 여수에서 20여년 판소리 강사를 하다가 1980년대에 광주로 옮겨 사설 국악학원을 열어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광주에 살면서는 박춘성에게 <심청가>, 한애순에게 <흥보가>를 학습했다. 1990년에는 전남도립국악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면서 다시 성창순에게 <심청가>, 조통달에게 <수궁가>를 배우게 되었다.
 평생 판소리를 배우고 가르치면서 여러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으며, 박정자 명창이 보유한 동편소리인 미산제(일명 박초월 바디) <수궁가>는 가락과 사설 내용이 재미있고 시원시원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봉술의 수궁가에 비해 맺고 끊음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목구성이 수리성으로 동편소리에 적합하다는 평을 듣는다. 통성을 지니고 있으며, 목이 곰삭아 소리에 그늘이 있다. 상청은 부족하나 하청에 능숙하고, 붙임새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정 춘 실

정 춘 실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5호

  • 지정종목판소리 동편제
  • 생      몰1943. 3. 15. ~ 2019. 4. 23.
  • 인 정 일1998. 2. 21.
  • 전승계보〈춘향가〉 김세종 - 김찬업 - 정응민 - 정권진 - 성우향 - 정춘실 - 노민아·이슬비·김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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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춘실(鄭春實) 선생은 전북 남원시 운봉읍 출신으로, 13세 때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대금 명인 강백천의 집에 기거하면서 강도근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남원 춘향여성농악단 단원으로 전국 공연을 다녔지만, 17세에 농악단이 해체되자 판소리에 전념하게 되면서 김용운과 주광덕에게서 소리공부를 계속했다.
 17세에는 광주의 정광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100일 독공에 들어가 판소리를 집중 연마하는 수련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열성이 대단했다. 또 오정숙에게서 김연수제 <춘향가>를, 정권진에게 <심청가>를 배웠다. 판소리에 대한 열정은 계속되면서 38세부터 성우향 문하로 들어가 9년 동안 판소리에 계속 정진했다.
 1969년 여수 진남제 전국 명창 판소리 경영대회에서 1등을 수상한데 이어 1999년 제18회 남원춘향제 전국판소리 명창경연대회에서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89년부터 광주시립국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장흥도립대학, 남도예술고등학교, 광주예술고등학교에서 12년간 학생들을 가르쳤고, 광주전통문화관에서 6년간 전통문화예술 강좌를 통해 많은 시민들이 판소리를 배울 수 있도록 지도했다.
 동편제 춘향가 보유자인 정춘실 명창은 동편제 명창답게 좋은 목을 간직하고 있는 소리꾼으로 그의 소리는 통성으로 내지르는 굵은 목과 풍부한 성량을 느낄 수 있으며, 상청·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량을 가졌다.